FLASH 스페셜 2014 한여름호 : 하시모토 나나미
2014.08.08 발매
책과 바스켓과 노기자카와 하시모토 나나미
어린시절부터의 롱인터뷰 & 발굴사진관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독서만 하였다. 중학,고교때는 바스켓에 빠져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홋카이도에서 상경하여 바로 만난게 노기자카46의 오디션.
하시모토 나나미의 미래는 거기서부터 180도 바뀌었다. 노기자카46의 지적 미인의 실상으로 다가오다!
"신동" 나나미의 영재교육
2세부터 히라가나를 쓰고 있었다!
하시모토 나나미는 「하시모토 레이나」로 태어날 예정이였다.
「어머니 친구분이 아이에게 "레이나"라고 이름을 지었던거예요. 그래서 다른걸 생각해 봤더니 아버지가 "나나"를 넣고 싶어해서 "나나미"가 됐고 "美(미)"를 넣은면 이름부터 지지 않을까 싶어서 "나나미"가 되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이미지가 강한 그녀. 초등학교 4학년때에 전국모의고사에서 1위를 해냈던 에피소드는 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일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
「2세부터 히라가나를 썼던 것 같아요(웃음) 부모님이 교육열이 뜨거우셔서 특히 어머니가 『장래 곤란하지 않도록』이라 생각해주셔서
히라가나나 숫자표가 벽에 붙어있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때 배우는 구구단은 유치원 연장반부터 조금씩 외우도록 시키셔서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에는 『8단을 말해봐』하고 검사받았어요. 말 못하면 밖에 놀러가지 못하였으니깐 『어째서 나만...』이라고 울어버렸었어요.
어렸을 때에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가정내에서 기초를 다졌습니다. 주판학원엔 조금 다녔지만요」
예의범절에도 엄하셨다고
「젓가락 잡는 방법이 틀리면 매를 드셨어요. 태도와 상식도 철저히 가르침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울거나 떼를 쓰는 걸 무척 싫어하셨어요. 제가 넘어져 울것 같아지면 낮은 목소리로 『나니미상!』이라고 꾸짖으셨어요. 상을 붙이는 것은 화나셨다는 신호이므로 무서워서 울지 못했어요. 공공장소에서 예의범절에 안좋게 행동하면 발이 날아왔습니다(웃음) 」
평소엔 온화한 아버지였지만 화나면 무섭다. 하지만 아이는 떼를 쓰는 존재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일이였어요. 겨울 어느 날 뭔가 잘못을 해버렸는데 죄송합니다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집에서 쫓겨나서(웃음) 눈이 내려 쌓이는가운데 맨발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할아버지 집까지 걸어가려고 했어요. 저도 고집이 생겼던 거예요.
꼬마가 맨발로 걷고 있으니깐 지나가던 사람이 도와줬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훈육의 범위라고 생각하고 있고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주신 것에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훈육 때문이였을까, 소녀 나나미는 내성적이였다.
「원래 성격이 소심했었어요. 유치원에서 좀처럼 나설수 없어서 반에서 심술궂은애(여자)가 괴롭혔었어요. 그것이 점점 심해져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아』라고 떼를 부렸었지만 그것을 부모님이 들어주시지 않으셔서 결국 가게 되었네요」
(중략)
독서가의 길은 유년기부터
연간 400권을 읽는 아이
(중략)
산도 있고 계곡도 있던 중학시대,
무엇이 나나미를 그렇게 만들었나?
(중략)
장렬! 명문 바스켓부 매니저의 생활
(중략)
청춘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3년간 사복을 산 기억이 없어요. 산 것은 바스켓 대회기념 티셔츠 정도(웃음)」
나나밍의 발굴사진관
1세: 1세의 생일 딸기 케잌으로 축하
1세: 1년6개월 위를 향해서 '여기 봐~'
2세: 배가 고파졌던걸까,
3세: 시치고산(七五三) 할아버지가 써준 글자 앞에서
4세: 정말 좋아하는 동생과. 이때부터 귀엽다고 들었습니다.
상경, 그리고 아이돌로서의 '책임'이 나의 원동력
고된 매니저의 생활이 끝난 고3 여름, 자신의 진로를 마주봐야 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나가자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반대했던거예요. '아침에도 혼자 못 일어나는데 도쿄따위 무리'라고.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스스로 벌 수밖에 없다. 삿포로까지 버스로 2시간반을 걸려서 미대예비학교를 다녔었는데 여러 가지 비용은 아르바이트를 하여 겨우 겨우 냈어요.」
그런 고생 끝에 제 1지망의 미대에 합격. 그런 딸을 보고 부모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상경이 순조로워서 좋았지만 학비도 생활비도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므로 이것이 괴로웠다.
「부모로부터 독립했던 거예요. 학교와 알바를 왔다갔다하면 자는 시간이 없어져버리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러자니 마음이 횡해져서 뭘 위해서 상경한건지 자포자기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부모에게 손벌리지 않았다.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 노기자카46의 오디션광고였다.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1학년 여름, 응모하기로 했었어요. 그때까지는 주먹밥 1개 생활이였으므로. 연예인 세계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다른 아이들은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응모했지만 저는 생활해 나가야 한다는 절실한 동기였죠(웃음). 친구들과 어머니의 권유도 컸습니다. 어머니가 옛날에 모델을 권유받았었는데 거절했던 거예요. 만약했었더라면...하고 후회가 든다고 들었으므로 어떤 일도 경험이고 받아보자고 생각했어요」
타고난 미모는 노기자카46의 문을 열었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아이돌의 지식은 거의 없었어요. 마에다 아츠코상이 선발총선거에서 1위가 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 합격하고나서는 필사적으로 영상을 보고 지식을 얻었습니다. 오디션합격직후에 기자발표였으므로 이제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해 1주일간 울음의 연속이었네요. 하지만 떨어진 아이의 몫까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일기에 쓰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후 3 년간 노기자카46의 선두주자로 달려왔다. 묘하게 아이돌 세계라고 하는 "미로"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시선의 앞에 "출구"는 보이는 걸까.
「계속 하고 있는것은 "책임감"입니다. 맨 처음 악수회에서 감동했었어요. 이전까지는 평범한 사람이였던 저의 줄에 서 주신게말이죠. 그 이후 팬들이 원하는 저로 있지 않으면 안되겠구나라고 책임의 싹이 자랐습니다. 자신다움을 내보이는것도 즐겁기도 하고. 언젠가 그만둬야할 순간도 찾아오겠지만 그 날까지 후회를 남기지 않고 달려가고 싶어요. 주먹밥 1개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고 (웃음)」
스스로에게 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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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재밌어서 조금 옮겨봤는데 생략한 부분도 많아서 밑에 원문 첨부할게요.
대충 초등학교때는 책만 읽다가 중학교 들어가서 좀 놀고 중3 여름방학부터 다시 공부 시작해서 원하는 고등학교 합격.
고등학교 이후엔 농구부 매니저 생활. 전국대회도 출전하는 명문농구부라 이때 처음으로 도쿄라던지 오사카를 가게되었고 그 영향으로 대학은 도쿄로 가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건데 미대를 선택한 것도 집에서 홋카이도에 있는 대학을 가라고 하니깐 홋카이도에는 미대가 없으니 결국 도쿄로 가려는 명목으로 선택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쑻
처음엔 뭔 자기자랑을 그렇게 하나 했는데 보다보니자랑할만하던(=_=)
본인이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현실화 시키려는 의지라 할지. 그리고 거기서 나온 자신감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부러운 사람같네요.
개인적으로 이때부터 이 아이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긴 했지만 확실히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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